*선비 精神발상지 유네스코 世界遺産 영주 소수서원*

 

 

*紹修書院 (소수서원)*

# 榮州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最初의 賜額(사액) 서원으로 조선 중종 37년(1542년) 풍기군수 주세봉이 고려말의 儒學者이며

성리학자이신 회헌 안향선생이 태어나 자란 이곳에 그분을 기리고자 백운동 서원을 建立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퇴계 이황 선생이 풍기郡守로 부임하여 조정에 建議. "紹修書院" 이란 사액을 받게 되었다. 사액서원은 임금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下賜받고 면역의 特權을 가진 서원을 일컫는다. 경내에는 강학당. 장서각. 일신재. 직방재. 학구재

등의 옛 건물이 있으며 國寶 제111 호인 회원 초상과 보물 5점 등 많은 遺物이 소장되어 있다 #

 

 

*소수서원 매표소*

 

 

 

 

 

 

 

 

 

 

 

*당간지주*

 

 

 

 

 

*취한대로 가는 징검다리*

 

 

*翠寒臺 (취한대)*

# 취한대는 自然을 벗하며 詩를 짓고 學文을 토론하던 곳이며. 退溪 李滉 (퇴계 이황)이 攄를 닦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

 

 

 

 

 

*敬字 바위*

# 周世鵬 (주세붕)이 바위에 새겨 남긴 敬字. 경자는 선비의 덕목을 나타낸 글자로

공경과 근신의 자세로 학문에 집중한다는 의미이다 # 

 

 

 

 

 

*소수서원 은행나무*

 

 

*景濂亭 (경렴정)*

# 경렴정은 소수서원의 대표적 유식 공간으로 院生들이 詩를 짓고 學文을  토론하던 亭子이며.

중종 38년 (1543년) 주세붕이 백운동 서원을 만들면서 함께 세웠다 #

 

 

 

 

 

 

 

*경렴정 내부*

 

 

*서원경내로 들어가는 志道門 (지도문) *

 

 

*講學堂 (강학당) 보물 제403호*

# 강학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儒生들이 모여서 講議를 듣던 곳이며. 현판에 걸린 白雲洞은 서원의 처음 이름이다*

 

 

*강학당 내부*

 

 

 

 

 

 

 

 

*제향영역의 문성공묘 (보물 제1402호)*

# 晦軒 安珦 先生 (1243~1306년) 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安輔 (1302~1357년)와 謹齋 安軸.(1287~1348)

愼齋 朱世鵬 (1495~1554년)을 함께 모시고 每年음력 3월 9월 初丁日에 祭享하고 있다*

 

 

 

 

 

*藏書閣 (장서각)*

 

 

 

 

 

*典祀廳 (전사청)*

 

 

 

 

 

 

 

 

*日新齋 (일신재)*

 

 

*直方齋 (직방재)*

 

 

 

 

 

*學求齋 (학구재)*

 

 

 

 

 

 

 

 

 

 

 

 

 

 

*影情閣 (영정각)*

 

 

*좌측. 晦庵 朱子 (회암 주자).  # 현인의 학문을 집대성한 주자의 초상 #

우측. 晦軒 安珦 (회헌 안향). 孔子. 朱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 성리학을 집대성한 고려의 安子로 불리는 안향선생 초상이다* 

 

 

*좌측 愼齋 周世鵬 (신재 주세붕) # 最初 사액서원. 소수서원 창건자 #

우측 漢陰 李德馨 (한음 이덕형) # 관포지교를 나눈 오성과 한음의 장본인 #

 

 

*좌측 眉叟 許穆 先生 (미수 허목) 초상 # 조선 후기의 文臣 및 儒學者이자 歷史家 #

*우측 梧里 李元翼 (오리 이원익) 초상 # 忠武功 李舜臣을 살려낸 任辰倭亂 당시 領議政겸 도체찰사 #

 

 

 

 

 

 

 

 

 

 

 

*史料館 (사료관)*

 

 

 

 

 

 

 

 

 

 

 

 

 

 

 

 

 

 

 

 

*紹修書院에서 공부한 사람들*

# 우리나라 最初의 사액서원답게 이름만 들어도 今方 알 수 있는 人材를 많이 배출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거나

퇴계 이황의 學脈과 연관이 있다. 소수서원에서 학문을 닦은 사람들의 名部인 入院錄에는 "월천 조목". "초간 권문해".

"약포 정탁". "백암 김륵". 학봉 김성일". "성재 금난수". 격암 남사고". 당대의 名臣. 儒士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퇴계 이황의

풍기군수 부임을 前後하여 스스럼없이 師承 관계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은 壬辰倭亂1592~1598. 丙子胡亂

1636~1637 등 나라의 큰 변고가 있었던 時期 외에는 꾸준히 원생을 敎育시켜 1888년 마지막 입원 생을 받을 때까지 4000여 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시켜 인재양성과 성리학 發展의 요람이었다*

 

 

 

 

 

 

 

*서원옆 연못*

 

 

*서원 해설사의 강의을 듣고 있는 방문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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